우리는
사도직
피정의 집
청년사목
바오로 뜨락
바오로의 벗
수녀원 소식
자료실
img

우리는

창설자 / 이삭줍는 애덕의 수녀들

img

카리스마는 창립자에게 내린 은사로써,
거룩한 유산이며 시간과 공간을 꿰뚫어
오늘 우리의 삶을 비추어주는 빛이다.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의 카리스마 안에는 사명과 정신, 영성이 통합되어 나타난다.

우리의 사명은 애덕이고
정신은 단순, 겸손, 대담성이며,
영성은 그리스도 중심의 영성과 파스카의 영성이다.

창설자
루이 쇼베 신부
(Louis Chauvet, 1664-1710)

1688년 아비뇽에서 사제서품을 받은 루이 쇼베 신부는
1694년 샬트르 교구의 작은 시골 마을 러베빌 라셔날 본당 주임으로 파견되었다.

3세기에 걸친 긴 전쟁으로 황폐해진 마을 사람들의 인간적ㆍ영적 품위를 되찾는 일을 돕고자 그는 지극히 평범하고 겸손하게 특별한 이름도, 예정된 날도 없이 일상적인 흐름 속에서 공동체를 창설하였다.

1696년, 쇼베 신부는 공동체의 요람과 동네 아이들을 교육하는 학교로 사용하고자 본당 가까이에 작은 집 한 채를 마련하였다. 이웃을 향한 애덕의 삶을 살고자 본당 내 모든 아이들을 차별 없이 무료로 교육하고 환자를 돌보았다.

사제관 입구의 해시계에 새겨진 ‘Ultima Latet(The last hour is unknown, 마지막 시간은 알 수 없다)’라는 문구에서 평범한 일상을 ‘마지막 시간’으로 충실히 살았던 쇼베 신부님의 신앙을 고스란히 읽을 수 있다.

img

이삭줍는
애덕의 수녀들

img

우리는 사도 바오로를 본받아
그리스도 중심의 영성과 파스카의 영성을 사는 애덕의 수녀들이다.

쇼베 신부는 함께 일해 나갈 용기 있고 헌신적인 협조자들을 구했다. 러베빌의 마리 미쇼Marie Michau와 작은 촌락 후레네 레베크 출신의 바르브 후코 Barbe Foucault, 본당 가까이에 살았던 마리 안 드 티이 Marie Anne de Tilly, 그리고 아봉빌의 카트린 시루 Catherine Sirou 등이 자원하였다.
이들은 회색 옷을 입고 엄률 수도원의 수도자들이 지키는 수도규칙을 지켰으며, 다른 수도회 수도자들처럼 하느님께 자신을 바치는 약속을 했다. 수녀들은 생계를 위해 일하며 엄격한 극기와 가난을 살면서 맡겨진 일을 가능한 한 대가 없이 했다.

1700년, 작은 수도 공동체의 첫 원장으로 17세의 마리 미쇼를 임명하였다. 첫 원장이 1702년 11월 15일 전염병으로 세상을 떠나자 쇼베 신부를 도와 본회 창설에 헌신했던 귀족 처녀 마리 안 드 티이가 2대 원장이 되었다. 그녀는 공동체의 처녀들이 학교에서 어린이들을 가르칠 수 있도록 읽기와 쓰기를 지도하며 그들의 수도생활을 도왔다.

오늘도 어제와 같이 우리는 교회의 유익과 이웃의 필요를 위해 하느님께 온전히 바쳐진 애덕의 수녀들이다.
- 마리 안 드 티이

1703년 9월 28일, 마리 안 드 티이의 갑작스런 사망은 공동체에 커다란 타격을 주었지만 그녀가 남겨준 수도생활에 대한 가르침은 풍요로운 영적 자원이 되었다.

1708년, 루이 쇼베 신부는 이 학교 수녀들을 샬트르 교구의 폴 고데 데 마레 주교에게 위탁하여 공동체는 샬트르로 이전하였고, 이는 수도회의 성장에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수도회 모원을 샬트르로 이전한 후, 프랑스 국내의 각처에 분원을 신설해 발전을 거듭하여 해외로 선교 수녀를 파견하였다. 남 아메리카 주 기아나 Guyane의 총독은 1721년부터 그곳 병원에서 봉사할 수녀들을 파견해 줄 것을 요청해 왔으며, 1727년 4명의 수녀들이 기아나를 향해 떠남으로써 해외선교가 시작되었다.

전세계 SPC

첫 해외선교

수도회 창설 30여 년이 되어가는 1727년,
4명의 수녀가 남미대륙의 기아나를 향해 떠나 첫 해외선교의 문을 열었다. 수녀들은 하느님께 의탁하는 침착한 대담성으로 군인들과 유형수들을 위한 병원이 있는 선교지로 떠났다. 첫 해외선교사로의 부르심은 수녀들에게 선교의 열정을 불러일으켰다.

1848년부터 극동 아시아에로의 부르심에 응답한 본 수도회는 1848년 홍콩, 1860년 베트남, 1878년 일본, 1888년 한국, 1898년 타일랜드, 1900년 중국, 1904년 필리핀으로 확장되었다.

20세기

한 나무에서 여러 가지가 뻗어나 한 그루의 큰 나무가 되고, 그 나무가 숱한 비바람과 폭풍을 뚫고 새로운 가지를 뻗어 나가듯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는 시련과 폭풍을 뚫고 새로운 가지를 계속 뻗어 나가고 있다. 시대적인 요구와 필요에 응하여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아프리카를 비롯하여 미국, 유럽, 아시아 등 새로운 선교지에 선교 수녀들을 파견하고 있다.

국경 없는 가족

현재, 전 세계 40개국에서 4천 3백여 명의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의 수녀들은 국제적인 대가족을 이루어 서로 친교를 나누며 기쁨을 공유하고 있다. 하느님의 더 큰 영광을 위하여 ‘모든 이의 모든 것’이 되어 다양한 형태의 가난과 고통 속에 있는 사람들 속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나누며 봉헌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홍콩 서울 대구 타일랜드 필리핀 이탈리아 로마총원

한국설립

길고도 혹독한 박해가 끝나갈 무렵인 1883년, 조선교구 제7대 교구장으로 파리 외방전교회 블랑 주교가 취임하였다. 조선의 정치적 상황은 매우 불안정하였고, 질병과 기근이 계속되어 백성들의 생활은 곤궁하였다. 불안한 상황에서도 블랑 주교는 고아원과 양로원을 운영하였으나 많은 어려움이 있어 1887년 7월 프랑스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모원에 수녀 파견을 요청하였다.

수녀님들의 훌륭하신 주보 성 바오로처럼 우리도 우리가 받은 신앙의 은혜를 다른 사람들과 나눌 책임이 있습니다.
-블랑 주교의 서신 중에서

1888년 7월 22일 새벽 5시, 제물포항

흰 코르넷을 쓴 네 명의 첫 선교 수녀들이 아직 순교의 피가 마르지 않은 조선 땅에 첫발을 내디뎠다.

“수녀님들의 첫발을 조선 땅에 올려놓는 이때 수녀님들께 환영의 인사 말씀을 드립니다. 수녀님들의 힘과 생명을 바쳐 조선 사람들에게 봉사하기 위해 이곳에 오게 한 그 헌신을 보며 조선의 천사들도 바닷가에 나와서 수녀님들에게 감사드리고 있으리라는 것을 저는 의심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말고 오십시오.”
- 블랑 주교의 서신 중에서

7월의 찌는 듯한 날씨에 가마를 타고 서울까지 40리 길을 왔다. 그들의 첫 공동체는 정동의 임시 수녀원에서 시작되었다. 수녀들의 입국 일주일 후, 순교자 집안의 다섯 명의 지원자들-김해겸 마리아, 김순이 마리아, 김복우지 마리아, 박황월 글라라, 심발바라-이 입회하였다. 순교자들의 영성이 봉헌의 삶으로 꽃피기 시작하였다.

자카리아 수녀와 첫 선교 수녀들

자카리아 수녀는 조선에 온 첫 프랑스 선교 수녀로 한국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의 제 1대 원장이다. 자카리아 수녀와 에스텔 수녀는 1888년 5월 31일 샬트르를 출발한 후 사이공에서 두 명의 중국 수련 수녀-비르지니와 프란치스카–와 합류하여 두 달간의 긴 여행 끝에 조선에 도착했다. 수녀들은 수도생활의 씨앗을 뿌리며 가난과 질병 속에서 가난한 이웃들을 향한 사랑의 역사를 써 내려갔다.
자카리아 수녀는 6개월 후 장티푸스로 세상을 떠났다. 초창기 수녀들은 대부분 과로와 질병으로 일찍 세상을 떠났다. 첫 선교 수녀들의 숭고한 희생은 조선의 처녀들이 봉헌의 삶을 사는데 밑거름이 되었다.

계속되는 수녀들의 헌신이 깊이 뿌리를 내려 우리나라 근대화 과정에서 교육, 의료, 사회복지뿐만 아니라 영성적 성숙의 기반에까지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현재 서울관구와 대구관구에서 천여 명의 수녀들이 하느님 현존 안에 머물며 봉헌의 삶을 이어가고 있다.

하느님의 종,
근현대 신앙의
증인

하느님의 종 김정자 안젤라 수녀(1888~1950)와 김정숙 마리안나 수녀(1903~1950)

해방 후 공산당들의 탄압을 받으면서도 김정자 안젤라 수녀와 김정숙 마리안나 수녀, 그리고 강양자 마리 레지스 수녀는 황해도 매화동 본당과 본당 소속의 봉삼학교를 지키면서 교우들과 고락을 함께했다.

1950년 10월 15일, 본당 안으로 갑자기 들이닥친 공산당이 휘두른 칼, 낫, 창, 도끼, 몽둥이 등에 맞고 찔려 김정자 안젤라 수녀와 김정숙 마리안나 수녀가 순교하였다.

누구에게나 친절하고 온화했던 김정자 안젤라 수녀는 1920년부터 1950년 10월 15일까지 30년간 매화동 성당에서 소임하였다. 본당 경리, 사무 담당을 맡았고, 봉삼학교에서 교사로 일하면서 어머니와 같은 따뜻한 마음으로 여아들의 교육에 열정을 다하다 우리 수도회의 첫 순교자가 되었다. 성품이 조용하고 사랑이 많았던 김정숙 마리안나 수녀는 1926년부터 1950년 10월 17일까지 24년간 매화동 성당 봉삼유치원에서 소임하다가 우리 수도회 두 번째 순교자가 되었다.

하느님의 종 베아트릭스 수녀(1874~1950)

‘순교자의 나라 조선을 향한 열렬한 선교 열망’을 간직한 32세의 베아트릭스 드 마리 오두아르 수녀는 1906년 2월 22일 서울에 도착하였다.

천성적인 애덕의 삶을 통해 가난한 조선 땅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였던 베아트릭스 수녀는 정치적으로 혼란스러웠던 1944년 본원 원장으로 임명되었고, 해방과 함께 1948년 한국 수녀회가 관구로 승격되면서 초대 관구장으로 임명되어 수도회의 기틀을 잡았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해외로 피신할 기회가 있었지만, 한국 수녀들과 운명을 같이 하기 위해 남아있다가, 수련장 으제니 수녀와 함께 1950년 7월 17일 공산군에게 피랍되었다. 오로지 한국 순교자의 유해만을 몸에 지니고 눈보라 속에서 강제로 걸었던 280㎞의 죽음의 행진을 하다가 더는 걷지 못하게 되자 1950년 11월 3일 중강진 부근에서 공산군에 의해 총살되어, 사랑하던 한국 땅에서 숨을 거두었다.
마지막 길 위에서 베아트릭스 수녀는 당신의 사랑하는 자매 수녀들에게 수도회 규칙을 잘 지키라는 유언을 남겼다. 우리 수도회의 세 번째 순교자로 봉헌되었다.

양성과정

수련원과
수련기 생활

수련원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한 젊은이들이 그리스도의 길을 따르기 위해 준비하는 곳이다. 또한, 자신을 이끌어 가는 여러 동기를 식별하고 정화하며 복음에 따른 사도적 수도생활을 익히는 곳이다.

수련기 생활은 지원기 1년, 청원기 1년, 수련기 2년으로 나뉜다. 양성의 각 단계는 고유한 목표를 가지고 점진적으로 그리스도의 인격을 향해 성숙해 가도록 지향한다.

서원생활

성 바오로의 자매들은 그들을 먼저 사랑하신 하느님의 사랑에 응답하며 복음적 권고를 실천하기로 서원함으로써 자신을 하느님께 바친다.
복음적 권고 즉, 정결과 가난과 순명의 서원은 그리스도처럼 우리의 존재와 시간 전부를 흠숭과 희생의 제물로 봉헌하는 것이다.
봉헌의 목적은 구세주의 동반자로서 세상을 구원하고 하느님 나라가 이 땅에 임하게 하는 데 있다.

유기서원기
첫서원 후 종신서원 전까지 유기서원기 5년은 수련기의 연장이며 종신서원을 준비하는 기간이다. 이 시기에 젊은 수녀들은 하느님의 사랑을 위한 그들의 사도적 열성을 수도생활 안에서 통합해가는 길을 사도직 현장에서 체득하고, 영성적ㆍ신학적으로 성장해 나아가 사도적 수도자의 길을 준비한다.

종신서원
주님의 특별한 부르심에 겸손되이 응답하며 자신을 봉헌할 것을 서약하는 수녀들은 본회 회칙에 따라 정결, 가난, 순명의 구체적인 삶의 방법을 택하게 된다. 이는 온전히 그리스도의 뜻만을 택하겠다는 서약으로, 교회 앞에서 서원을 발함으로써 교회의 공적인 사람이 되고, 수도회의 정회원으로 받아들여진다. 이를 위해 1년간의 수련과정을 거친다.

계속 수련
우리의 충실성은 부단한 회개와 깨어있는 삶을 전제로 한다. 특별히 다양하고 변화가 많은 현시대는 더 계속적인 쇄신을 필요로 한다.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는 그 회원들이 형제적 공동체를 이루어 산다.
수도 공동체는 같은 성소를 받아 하느님을 사랑하고 형제들에게 봉사하려는 원의를 가진 사람들의 영적인 공동체이다.
서로 다른 개성을 지닌 다양한 회원들 간의 깊은 형제적 일치는 사람들에게 장차 올 하느님 나라를 미리 보여주고, 사도직에 활기를 더해 준다.